1996년 10월 23일, 정의를 향한 외침
1996년 10월 23일 새벽, 시내버스 운전기사 박기서 씨는 40㎝ 길이의 나무 방망이 '정의봉'을 숨긴 채 비장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습니다. 이날은 그가 10여 년간 품어온 결심을 실행하는 날이었습니다.
백범 김구, 박기서의 마음속 '위대한 지도자'
박 씨는 우연히 접한 '백범일지'를 통해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백범 김구 선생을 '위대한 지도자'로 마음속에 새겼습니다.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도 호(號) '백범'을 '백성'과 '범부'에서 따온 김구 선생의 겸허함이 박씨를 감동시켰습니다.
안두희, 민족 반역자, 그리고 박기서의 분노
반면 김구를 권총으로 살해한 안두희는 그에게 '민족 반역자'였습니다. 안두희는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 경교장에서 김구를 암살한 뒤에도 실질적 법적 처벌 없이 노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10년간의 결심, 그리고 실행
1994년 박 씨는 수첩에 "안두희를 자연사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는 문장을 적었습니다. 1995년 김구 49주기 추모제에서 박 씨는 백범기념관 유품과 사진을 바라보며 결심을 굳혔습니다.
정의봉, 정의를 실현하다
범행 당일 박 씨는 아내에게 "대전으로 등산 간다"는 말만 남기고 집을 나섰습니다. 6시간가량을 기다린 끝 안두희의 동거인이 집을 나서기 위해 현관문을 열자 박 씨가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김구 선생을 시해한 너를 죽이러 왔다" 박 씨가 마주한 안두희를 향해 던진 첫마디였습니다.
재판과 석방, 그리고 정의봉의 의미
구속 상태로 재판에 넘겨진 그는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습니다. 2심 재판부는 "국민적 분노가 범행 동기에 반영된 점을 부인할 수 없다"며 징역 3년으로 감형했습니다. 대법원은 박 씨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형을 확정했고, 그는 1998년 3·1절 특사로 석방됐습니다.
故 박기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다
출소 후 박 씨는 다시 버스와 택시 운전대를 잡았습니다. 박 씨는 지난 7월 10일 향년 78세로 부천의 한 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그의 상징이 된 정의봉은 현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돼 보존되고 있습니다.
결론: 故 박기서, 정의를 향한 10년의 결심
故 박기서 씨는 김구 선생 암살범 안두희에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10년의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의 용기와 헌신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정의의 가치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박기서 씨가 '정의봉'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박기서 씨는 '정의봉'을 통해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에게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그의 오랜 결심의 결과였습니다.
Q.박기서 씨의 재판 결과는 어떠했나요?
A.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에서 감형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습니다.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지만, 3·1절 특사로 석방되었습니다.
Q.현재 '정의봉'은 어디에 보관되어 있나요?
A.故 박기서 씨의 '정의봉'은 현재 식민지역사박물관에 기증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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