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명의 남자와 잠자리를… 페기 구겐하임, 그녀의 '섹스 리스트'가 예술을 꽃피우다
구겐하임, 예술과 욕망의 경계에서 피어난 이야기
“나는 1000명의 남자와 잤다.” 업무상 만난 사이였지만, 일 얘기는 길지 않았다. 그녀의 목적은 애초부터 ‘이 남자를 어떻게 침대로 끌어들일까’였으니까. 미혼과 유부남을 가리지 않았고, 중년과 청년을 아울렀다. 욕망이라는 자석에 이끌린 숱한 남자들이 그녀의 ‘섹스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어중이떠중이와 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리스트에는 시대의 거장들이 망라돼 있었다. 아일랜드 대문호 사무엘 베케트, 현대 미술의 거장 막스 에른스트, 실험 음악의 대가 존 케이지. ‘님포매니악’(섹스중독자)이라는 멸칭과 ‘아트에딕트’(예술중독자)라는 상찬의 틈 사이에 그녀가 있었다. 시대가 규정하는 도덕관에 애써 자기 자신을 끼워놓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했고, 자신만의 기준을 세웠으며, 본인의 욕망에 충실했다. 천명의 남자와 잔 얘기를 그대로 책으로 내기도 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았고, 손가락질이 기꺼웠다. 현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페기 구겐하임의 이야기다.
구겐하임 가문의 부와 예술, 그 궤적을 따라
‘구겐하임’은 미국의 이름난 부호였다. 은·납 광산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일군 가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메리칸드림’ 서사의 대부분이 그랬듯이, 시작은 미약하기 그지없었다. 1847년 스위스 구겐하임 지역. 동네 이름을 자신의 성으로 삼던 열아홉살의 마이어는 야망을 키우며 미국으로 건너왔다. 행상으로서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억척스러운 삶을 이어간 끝에, 상당한 부를 일궜다. 수입해 팔던 스위스 자수품이 상당한 고객을 모아서였다. 입에 풀칠할 정도는 됐지만, 여기에 만족할 순 없었다. 고작 이 정도 돈을 벌기 위해 고향 땅을 버리고 대서양을 건너온 것이 아니었다. 마이어는 콜로라도 지역에 매물로 나온 은·납 광산을 사들였다. 1881년 마이어의 나이 50대 중반. 그는 또 한 번 인생을 베팅했다.
타이타닉 비극, 페기의 예술적 각성을 이끌다
페기의 아버지 벤저민은 광산업을 하다가 1912년 불의의 사고로 요절하고 말았다. ‘타이태닉 침몰’이었다. 부호였던 그는 사고 현장에서 구조정을 먼저 타고 나갈 수 있었지만, 자신보다 어려운 이들에게 자기 자리를 내어줬다. 당시 페기의 나이 14살이었다. 아버지라는 울타리가 사라지자, 그녀는 신경쇠약을 앓았다. 마음을 보듬어줄 것이 없어, 자주 방황했다. 몸과 마음이 몇 차례 흔들린 끝에 길을 찾았다. ‘예술’이었다. 아버지라는 방파제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자유’를 의미하기도 했다.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은 페기는 스스로의 삶을 결정할 수 있었다. 흥미가 가는 대로, 발걸음이 닿는 대로, 그는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어렸을 적부터 마음을 달뜨게 했던 ‘예술의 세계’로였다. 없던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보수적인 ‘구겐하임 패밀리’를 잊게 만드는 것이었다.
파리 몽파르나스, 페기의 예술적 사랑과 좌절
페기는 예술의 진수를 찾고 싶었다. 1921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예술혼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곳 몽파르나스에 자리를 잡았다. 마르셀 뒤샹, 앙드레 브루통, 막스 에른스트 등 전위 예술가들이 ‘초현실주의’, ‘다다이즘’으로 세상을 뒤엎고 있던 곳이었다. 페기는 예술가들을 뜨겁게 사랑했고, 그 혼불에 크게 데였다. 첫 남편은 당시 파리에 거주하던 미국인 작가겸 조각가 로런스 베일이었는데, 그는 결혼 직후부터 페기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거친 남자였다. 진득한 잼을 머리카락에 문지르면서 모멸감을 주기도 했다. 주먹을 휘두르는 것도 모자라 동료 작가 케이 보일과 불륜을 저질렀다. 두 사람은 이혼했고, 페기는 새 삶을 찾아 나섰다. 존 페라 홈스는 그의 진정한 사랑이었다. 영국 출신인 그는 작가를 꿈꿨지만, 크게 성공하진 못했다. 문학 비평으로만 제법 이름을 알렸을 뿐 소설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우연한 기회로 존을 만난 페기는 글을 사랑하는 그에게 마음이 갔다. 곧 두 사람은 격정적인 사랑에 빠졌다. 페기가 “내 생애의 사랑”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신은 페기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 것이었을까. 홈스가 작은 수술을 받다가 죽었다.
쾌락, 예술, 그리고 현대 미술과의 조우
페기는 더 이상 사랑을 믿지 않았다. ‘실존’하는 건 쾌락과 예술뿐이었다. 자신을 절정에 오르게 하는 것만이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서였을지. 그녀는 수많은 예술과들과 침대에서 굴렀다. 그중 하나가 아일랜드의 대문호 사무엘 베케트였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빠져들어 나흘 밤낮으로 사랑을 나눴다. 그 사랑이 너무나 격렬한 나머지, 침대 밖을 나오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마치 짐승처럼 사랑을 나눈 뒤 허기 질때만 샌드위치를 사러 나왔다. 단발성 쾌락이 허무만 가져온 건 아니었다. 페기는 침실에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곤 했다. 사무엘 베케트는 페기에게 “현대미술에 전념하라”고 조언했다. 과거의 예술에 집착하는 건 창조와 결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페기가 현대미술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계기였다. 마르셀 뒤샹과 친구가 됐고, 피카소, 브란쿠시의 작품을 접했다. 페기의 연인으로서 영감을 준 아일랜드 문호 사무엘 베케트.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예술을 지키다
전쟁은 꽃을 짓밟는 행위겠지만, 씨앗은 군홧발 사이에서도 싹을 틔웠다. 나치의 군화 소리가 유럽 전역에 울려 퍼지던 1941년. 미국인이었던 페기 구겐하임은 귀향을 결심한다. 혼자가 아니었다. 나치에 위협받던 모든 예술가, 그리고 그들의 영혼이 담긴 작품과 함께였다. 나치 집권기인 1939년부터 2년 동안 페기는 닥치는 대로 작품을 사들였다. 호안 미로, 칸딘스키, 마그리트, 피카소 등의 걸작 170여점이 함께였다. 나치가 이를 빼앗을까 두려워 자신의 침구 사이에 작품을 껴놓기도 했다. 눈물겨운 피난 길이었다. 독일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도 그녀를 따라 도미했다. 전쟁 통에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결혼하기도 했다(전쟁이 끝난 다음 해 이혼했다).
예술의 수호자, 페기 구겐하임의 유산
1946년 자신의 성생활을 과감히 드러낸 자서전 ‘어느 미술 중독자의 고백’을 출간하기도 했다. 1000명의 남자와 잠자리하고, 7번 낙태를 했던 일이 고스란했다. 문란하고 부도덕한 사교계 명사라는 손가락질도 그녀의 자신감을 꺾진 못했다. 기성 예술계에서도 “페기는 예술품을 수집하듯 남자를 수집한다”고 힐난했다. 구겐하임 패밀리에서도 페기는 ‘앙팡 테리블(악동)’ 그 자체였다. 미술계는 폄훼했지만, 페기는 예술의 구원자이기도 했다. 나치에게 스러질 예술의 거장들을 미국으로 옮겨심은 이였기 때문이었다. 예술가들이 서 있는 곳이 예술의 수도였기에, 아방가르드 예술가를 품은 뉴욕은 현대미술의 본고장이 됐다. 이 모든 예술의 천도(遷都)를 주도한 이가 페기였다.
페기 구겐하임, 예술과 욕망의 경계를 넘나들다
페기 구겐하임은 1000명의 남자와의 관계, 파격적인 삶, 그리고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현대 미술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녀는 나치의 위협 속에서도 예술가들을 보호하고, 새로운 예술을 발굴하며 시대를 앞서나갔다. 구겐하임이라는 이름은 예술 후원의 상징이 되었고, 그녀의 삶은 예술과 욕망의 경계를 넘나드는 도발적인 이야기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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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페기 구겐하임은 왜 그렇게 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었나요?
A.페기 구겐하임은 예술과 쾌락을 동일시하며, 자신을 절정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을 가치 있게 여겼습니다. 이는 그녀의 자유로운 영혼과 예술에 대한 헌신적인 태도를 보여주는 방식이었습니다.
Q.페기 구겐하임이 현대 미술에 기여한 점은 무엇인가요?
A.페기 구겐하임은 나치 치하에서 유럽의 예술가들을 구출하여 미국으로 이주시켰고, 잭슨 폴록과 같은 젊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미국 추상 표현주의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그녀는 현대 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Q.구겐하임 미술관은 어떻게 설립되었나요?
A.페기의 삼촌인 솔로몬 구겐하임은 자신의 미술품 컬렉션을 전시하기 위해 미술관 설립을 추진했고,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에게 설계를 의뢰하여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이 탄생했습니다.